문학/오늘의 추천시

당신이라는 지팡이--박해람

엄학섭 2009. 8. 23. 09:34
당신이라는 지팡이--박해람
-故 김대중 선생님의 영전에 마음 숙여-

당신이 잃은 한 쪽 걸음과
당신이 얻은 작은 지팡이가
오늘은 같이 쉬고 있겠군요.

고난을 걸어 온 두 개의 외로운 존재들이 서로
나란히 발 뻗고 편히 쉬고 있겠군요.

한 쪽의 걸음을 빼앗겼을 때
당신은 그 누구의 손길이 아닌
지팡이 하나를 잡았습니다.

그 작은 점 하나가 지나간 자리마다
사람들은 그곳에 평화가 있었다고들 했습니다.

힘주어 찍은 그 점 속에
오열이, 때로는 분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.

그 작은 흔적이지만
그곳은 씨앗이 자라는 곳이었습니다.

늘 지팡이를 앞세워 걸으셨고
성한 걸음보다는
힘든 한 쪽의 걸음에 더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.

그렇습니다.

성하고 편한 걸음으로야 어찌 그 길을 다 걸으셨겠습니까.

그 험한 길을 어찌 편히 걸으셨겠습니까.

당신이 묵었던 좁고 추운 독방에서
그 한 쪽의 다리는 또 얼마나
밤마다 통증으로 울었겠습니까.

괜찮다, 괜찮다
당신은 또 얼마나 이 땅 민중을 쓰다듬듯
우는 한 쪽의 다리를 주무르셨겠습니까.

이제 당신이 울먹였던 순간들을 오래 간직하겠습니다.

당신이 원했던 그 마음
우리에게 울음이 고일 때마다
당신의 울음으로 대신하겠습니다.

수천 수 만 겹의 울음을 빌리겠습니다.

당신이 우리의 눈물이 되신 것을 믿습니다.

오늘 당신은 참 단단한 지팡이입니다
절룩이는 민족과 절룩이는 삶과 절룩이는 지금의 이 시대를 향해
슬며시 건네져오는 당신이라는 지팡이.

귀하게 두 손으로 받들겠습니다.

세상의 그릇된 곳마다 당신이 지팡이로 꼭꼭 찍으셨듯이
피해가지 않고 돌아가지 않겠습니다.

이제 당신은 우리 모두의 지팡이입니다.

'문학 > 오늘의 추천시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셰익스피어가 주는 교훈  (0) 2009.09.17
가을날--릴케  (0) 2009.08.31
흔들리며 피는 꽃--도종환  (0) 2009.08.15
겨울날의 동화--류시화  (0) 2009.08.13
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--장경린  (0) 2009.08.03