문학/오늘의 추천시

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--신용목

엄학섭 2008. 4. 13. 07:44

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--신용목

 

 

나는 천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
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

塔을 말하는 일을 塔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


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
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
통처럼 끔뻑일 때


숨은 별밭을 지나며 바람은 묵은 이빨을 쏟아내린다 잠시 구름을 입었다 벗은 것처럼
허공의 연못인 塔의 골짜기


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
새가 앉았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


천년은 가지 않고 묵은 것이니 옛 명부진 해 비치는 초석 이마가 물속인 듯 어른거릴 때
목탁의 둥근 입질로 저무는 저녁을


한 번의 부름으로 어둡고 싶었으나
중의 목청은 남지 않았다 염불은 돌의 어장에 뿌려지는 유일한 사료이므로


치통 속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가 파닥인다


허공을 쳐 연못을 판 塔의 골짜기
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년의 꼬리로 휘어지고 천년의 날개로 무너진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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